본문 바로가기

서신

"가방 속에 넣어 두고 꺼내 보는 詩集 한 권 있니?"

CK!
가방 속에 넣어 두고  꺼내 보는 詩集 한 권 있니?
 
햇살 따스한 카페 창가에 앉아
주문한 에소프레소 한 잔을 기다리며
토요일 오전, 운동을 마치고 샤워한 후 쾌적한 마음으로
가방에 넣어 온, 도종환 詩集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을 손에 쥐고 "소금", "사흘 뒤", "사의재(四宜齋)"
세 편의 詩를 음미한다. 
 
에스프레소 커피 향이 은은하다. 
한 모금 삼키며 찬찬히 그 시들을 마음에 새긴다. 
반복해서 다시 그 詩편들을 음미 한다.
무언지 형언키 어려운 일렁임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움직인다.
명징한 반향.
 
찻잔을 내려놓으며 
햇살 속에서 걸어 다니고 있는 행인들을 찬찬히 살핀다.
주말의 전통시장은 가족들이 함께 나와 붐빈다. 
시장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들이 푸근하다.
詩想이 주는 감동과 사람들의 모습이 오늘따라 왠지 좋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문득 사랑하는 아이들을 생각한다.

'CK! 너는 가방 속에 넣어 두고 가끔 한가한 시간에 꺼내 보는 詩集이 한 권 있니?'
혼자 말을 입 속에서 되뇌며 '부디 속깊은 사람 되길… 사랑한다....'라고,
독백한다.
 


  소금

  썩어가는 것들과 맞서면서
  여전히 하얗게 반짝일 수는 없다
  부패하는 살들 속에서
  부패를 끌어안고 버티는 동안
  날카로운 흰빛은 퇴색하고
  비린내는 내 몸을 덮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저게 무슨 소금이야 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을 경전은 거룩하게 기록했으나
  이승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비린내 나는 세상을 끌어안고 버티는 일
   버티다 녹아 없어지는 일
  오늘도 몸은 녹아내려
  옛 모습 지워지는데
 
  그걸 보고 사람들은 저게 무슨 소금이야 한다
 
***
 
  사흘 뒤
 
  마음 놓고 슬퍼할 시간이 없다
  마음 놓고 기뻐할 시간도 없다
  돌아오는 길
  어두운 뒷자리에서
  혼자 많이 울었다
 
  큰일 치르고 난
  사흘 뒤
 
***
 
  사의재(四宜齋)
 
  잿빛 구름에 가려
  은빛 해 보이지 않는다
  비릿한 바람에 산발한 머리카락 어지럽다
  장기곶으로 갔다가 다시 강진으로 유배 온 지
  여러달이 흘렀다
  권력을 지키지 못한 죄가 크다
  대왕의 개혁 권력이 무너진 뒤 정국은
  급격히 보수화하고 있다
  선왕은 다시 만나지 못할 분이었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잃어버리고
  목숨만 겨우 부지하여
  위리안치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참담하다
  살아있다는 것이 참으로 욕되지만
  생각을 담백하게 하고 용모를 단정히 하며
  다시 과묵해야겠다
  다시 진중해야겠다
  수구 주류와 외척 정치에 끈을 대려는 이들이
  나를 살려두면 안 된다는
  상소를 다투어 올리고 있다 한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일도 무겁지만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 또한 무겁다
  난제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보자
  대왕의 장례가 끝났으니
  나도 이미 죽은 것이라 여기자
  열망이 앞섰던 지난 생애를 곡하고
  여기 이 유배지 행랑채에서 다시 시작하자
  종자보다 중요한 게 흙의 힘이라는
  주막집 안주인 말은 의미가 깊고 크다
  이 누옥의 빈궁한 처소를 사의재라 부르자
  기민들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의 목록을 정리하자
  태풍이 지나간 뒤 다시 또 태풍이 몰려올 듯싶다
  바람의 냄새가 예사롭지 않다
  받아들이자
  몰려오는 거친 바람의 거친 보복과
  사나운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침착하게 그것들을 대면하자
 

    -도종환 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pp.32~35.

 
   

"아들에게 보내는 서신"

  
  
 
 
 
 
 
  
 

'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CK에게  (4) 2025.07.25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  (2) 2025.06.18
지연에게  (0) 2025.04.10
지금, 내 안에 맑게 비친 그대에게  (0) 2025.04.09
시월의 멋진 생일, 지현에게  (0) 2024.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