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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58.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 가르쳐도 가르친 바 없음)

58.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 가르쳐도 가르친 바 없음) 

기자명 진우 스님
 
 

연기하는 모습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바로 중도이며 정토

연기하는 모습에 분별심 얹게 되면 생사의 사바세계 펼쳐져
견과 관은 뜻이 달라 견은 눈으로, 관은 지헤로 보는 것 의미
여래에 삼십이상이라는 특별한 상 있다는 견해는 삿된 분별 

분별심을 갖는 이상 극락에서도 지옥이 생긴다. 육신통을 부려도 고락의 분별 인과를 안고 있는 이상 괴로움은 피할 수 없다.  [법보신문DB]

약유중생 여래도자 여래 즉유아인중생수자(若有衆生 如來度者 如來 卽有我人衆生壽者) 수보리 여래설 유아자 즉비유아 이범부지인 이위유아(須菩提 如來說 有我者 卽非有我 而凡夫之人 以爲有我) 수보리 범부자 여래설즉비범부 시명범부(須菩提 凡夫者 如來說卽非凡夫 是名凡夫) “만약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있다’라고 한다면 여래에게는 곧 나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오래 산다는 사상이 있게 되느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설하는 나라는 것은 곧 나가 있지 않음이니, 다만 범부들이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범부라 하는 것도 여래가 설할 때는 곧 범부가 아님을 말하는 것이니, 그 이름만을 범부라고 하느니라.”

여래는 ‘있다, 없다’ 하는 분별이 없어서, 만약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이미 제도하지 못한 중생이 생기는 것이므로, 영원히 제도하지 못한 중생이 생기고 마는 것이다. 이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사상(四相)이 생기게 되는 것이므로 결코 여래라 할 수 없음이다. 그래서 여래께서 범부(凡夫)라 한다면 분별상(分別相)이 없는 가운데 범부인 것이니, 이는 그 이름만을 범부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느 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분별을 한다면, 동시에 싫고 나쁜 사람이라는 분별상이 생기게 됨이니, 분별상이 없는 가운데서는 그냥 그 이름만이 사람일 뿐인 것과 같음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평등성(平等性)에서 평등이라는 생각의 지견(知見)을 지으면 안되는 것이므로 이러한 분별된 지견을 갖지 않는다면, 중생이 스스로 적멸(寂滅)하여 여래가 멸도할 중생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여래가 멸도할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지견이 생긴 것이므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이 생김이다. 이는 여래의 성품이 아니다. 그러나 여래께서는 이 사상을 말씀하시지만, 이 사상에 머무름은 아니시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아(我)를 말씀하시는 것은 곧 아(我)가 있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래의 경계에서는 본래 아(我)가 없는 것이지만, 범부 지견에 맞추어 아(我)라고 하심이다. 그러니 여기서의 아(我)는 곧 범부의 아(我)인 것이요, 여래의 아(我)는 아닌 것이다. 비유하면 원숭이의 음성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원숭이와 접촉할 때, 원숭이의 언어를 사용한다 해서 이 사람이 원숭이가 되는 것은 아님과 같다. 따라서 여래께서 범부라 한 것은 곧 범부가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니, 그 이름이 범부일 뿐이라는 말씀이다.

 

스스로 소심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혈액형으로 보면 A형을 가진 이들이 주로 생각이 많고 뒤끝이 있다 하여 소심파로 분류하기도 한다. 물론 의학적으로나 통계적으로 증명되진 않았다. 아마도 A형이 인구의 절반을 넘으니 그런 속설이 생긴 것 같다. 소납의 생각으로는 욕심이 적은 이들이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아닐까 싶다. 역설적으로 큰 욕심이 없다는 방증이다. 매사 돌다리도 두드리는 조심성과 함께 상대의 뜻 없는 말에도 자주 오해를 하게 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한마디로 배짱이 약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는 자신감이 떨어져서 일 수도 있으나, 불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부처님 법에 대한 신심이 부족하다 할 수 있다. 인과, 인연, 그리고 연기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분별심이 원인이기도 하다.

소심하다는 의미는 걱정 근심이 많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 이제부터 배짱 있게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인과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가져야 한다. 어차피 좋고 싫은 고락의 인과가 달라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를 원하면 원하지 않는 하나가 생기게 되고, 열을 원하면 원하지 않는 것 또한 열이 생기는 것이 인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하는 것이 없으면 원하지 않는 것 또한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인연 연기에 맡기고 마음을 놓아버리면 걱정 근심과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게 되어 있다. 문제는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잘 되야지 하면 잘 되지 않는 것이 생기게 되고, 그것이 현실로 이어지게 된다. 잘되는 것을 굳이 분별하지만 않는다면, 잘되지 않는 것도 나타나지 않게 되고 보이지 않게 된다.

잘 되는 것과 잘되지 않는 것을 분별하지 않으면 연기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연기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이고 정토(淨土)이다. 거기에 분별심을 얹게 되면 생사(生死)와 생멸(生滅)이 생기고 사바세계가 펼쳐진다. 보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정토(淨土)임에도 불구하고, 좋고 싫은 고락(苦樂)을 얹어 집착하면 예토(穢土-괴로움의 세상)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배짱 있게 살아야 한다. 여기에서 배짱이란 겁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절대적으로 불법을 잘 믿으면 배짱이 생긴다. 불법은 인과, 인연, 연기법이고 중도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걱정 근심할 필요도 없고 화낼 필요도 없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 그러면 용기와 힘이 생긴다. 그러하여 불만이 없어지면 욕심도 사라지게 되고, 욕심이 없으면 지나친 행동을 자제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순리를 따르게 된다. 순리는 곧 중도행(中道行)이고 무애행(無礙行)이다.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 법신은 상이 아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 관여래부(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觀如來不)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삼십이상을 여래라고 볼 수 있겠느냐?”

삼십이상(三十二相)이란 서른두 가지로 보는 상법(相法)이 만점(滿點)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구족상(具足相)은 부처님과 전륜성왕(轉輪聖王)만이 소유한 것이다. 태자 시절 선인이 정반왕에게 말하기를 태자의 상(像)은 삼십이상(三十二相)을 구족하고 있으니 전륜성왕이 아니면 부처를 이룰 것이라고 하면서, ‘그 가운데 부처님이 되어 무상법륜(無上法輪)을 굴리실 것이온데, 내가 나이가 많아 이 법을 듣지 못할 것 같아 슬퍼하노라’고 하신 연유이다. 관(觀)과 견(見)은 뜻이 전혀 다름이니, 견(見)은 눈으로 보는 경지이고, 관(觀)은 지혜로 보는 경지를 말함이다. 전에 수보리가 여쭙기를, 부처님이 얻으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얻은 바가 없습니까? 이때 부처님은 ‘그러그러하다’고 인가하시었는데, 이를 듣는 청중들은 의심이 이는 대목이 있었다. 만일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바 없이 얻으셨다고 한다면 이는 얻음이 없는 것이다. 얻음이 없다고 하는 것은 본래 그대로 청정(淸淨)한 본성(本性)이므로, 얻거나 얻지 못했다는 개념조차 없음이며, 새로이 얻을 것이 없음이다.

그렇다면 본래 얻을 것이 없다 한다면, 청중이나 부처님, 그리고 일체중생이 다 그러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여래만 삼십이상(三十二相)이 있을 것인가? 여래만이 얻는 것이 아닌가? 의심함이다. 그러한 고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삼십이상을 여래라고 볼 수 있겠느냐? 되물으신 것이다. 이를 물으신 뜻은, 본래 청정본성에 있어서 ‘너희들이 본성(本性)과 색신(色身)을 달리 보고 있구나’ 하는 뜻이 있는 것이다. 본래 구족한 본성은 곧 구족한 법신이 되는 것이므로, 법신과 색신을 따로 보는 분별지견을 내지 말라는 말씀이시다. 법신이 곧 색신인 줄 알 때, 삼십이상과 범인상이 함께 실답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여래가 삼십이상이 있다는 망상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시다. 한마디로, 여래가 삼십이상이라는 특별한 상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삼십이상이 없는 범인상이 또 생기게 되는 분별을 일으키게 되므로, 이는 아직 깨치지 못한 마음으로써, 좋고 싫은 고락의 인과를 겪게 됨은 물론,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한다는 뜻이다. 

또 하루가 지났다. 과연 어제 하루는 얼마나 보람이 있었으며 또 보람이 없었던가? 얼마나 좋은 일이 있었으며 얼마나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가? 지난 하루의 잘잘못에 대해, 그리고 좋았고 싫었던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여 되돌아보며 복기해 보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사람이 움직이고, 생각하고, 말을 하는 이유, 즉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행하는 것은, 누구나 당연히 싫고 나쁜 기분을 갖지 않기 위함이고, 좋은 기분을 유지하려는 본능의 발로다.

세상을 구하는 큰일을 하거나, 교양 있고 덕 높은 삶을 살거나, 역사적인 인물이 되거나, 전쟁의 영웅이 되거나,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거나, 부자와 권력자, 등등의 엄청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分別)된 마음을 갖는 이상, 나머지 현상은 인연, 연기라는 공의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다. 이를테면 이런 엄청난 일을 함으로써, 그 일에 의한 혜택을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해도, 이는 각자의 고락, 인과에 있어서는, 결과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결코 아닐뿐더러, 이 또한 언젠가는 사라질 허상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의 원시적 삶에 있어서나, 과학의 발달로 인한 현대 문명을 최대로 누리고 사는 현재의 삶에 있어서나 업겁(業劫)에 있어서의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각 개개인의 좋고 싫은 고락의 인과는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말이다. 생로병사는 물론, 상대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에 있어 차이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소위 마음이라고 하는 자신의 감정을 중도롭게 하지 아니하고, 좋은 것을 분별하는 탐진치(貪嗔痴) 삼독(三毒)의 마음 감정을 갖는 이상, 그 질량만큼, 어느 곳, 어느 때, 무슨 일을 하든지 이를 막론하고, 싫고 나쁜 고락 인과의 감정이 항상 따라붙게 된다는 것은, 불멸, 불변의 법칙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만든 괴로움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좋고 싫은 고락의 인과를 짓지 않고 이를 분별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대로가 부처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되는 것이니, 그 어떤 마음, 그 어떤 감정도, 그대로 놓아버림으로써 스스로 마음을 편안하고 평안케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쉽지 않다. 어렵고도 어렵다. 그러나 이 방법 이외에는 평안한 중도심을 갖지 못하고 항상 고통과 괴로움을 벗어날 길이 없다 할 것이다. 그러니 화두(話頭)를 항상 놓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화두란 팔만사천의 부처님 법문이다. 즉 좋은 것을 찾으면 찾을수록 싫고 나쁜 과보가 따른다는 인과의 법을 아는 것이 화두이다. 이를 화두로 삼으면, 이 화두 안에 선(禪)이 있고, 반야(般若), 적멸(寂滅)이 들어있으며 인과, 연기, 공과 중도, 열반이 들어있다. 분별심을 갖는 이상, 극락에서도 지옥이 생긴다. 따라서 육신통을 부리고, 유체이탈의 재주를 부린다해도, 좋고 싫은 고락의 분별 인과를 안고 있는 이상 괴로움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화두를 놓치지 않아야 바로 지금 현재 평안할 수 있다. 지금 편치 않으면 영원히 편치 않다. 우선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으로서 화두를 챙겨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청정히 한다면 마음은 항상 평안해질 것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