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감각감상

잘 사는 사람

  절친한 분을 모시고 친구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자리를 파할 즈음에 내가 오늘 식사비를 부담하겠다고 말하자, 절친한 그 선배가 대뜸 "저이가 잘 사는 사람이니 점심식사비를 부담해도 된다."라는 말을 했다. 함께 자리한 친구들은 우리가 각각 나눠어서 부담하자고 했는데 그 선배가 식사비 부담에 대한 작은 실랑이를 그렇게 단칼에 교통정리를 했다.
  ’잘 사는 사람이라...‘
  모두 헤어져 귀가하는 차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정말이지 이 한 생을 잘 살고 가야 할터인데...'라며...
  어떻게 살아야 잘 산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잘 산다"는 말은 경제적으로 유복하게  사는 사람을 그렇게 지칭한다. 
  하지만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사람도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자수성가를 해서 남을 위해 공익에 희사하면서 자신의 부를 누리는 사람과, 남에게는 인색하면서 자신의 혈연들이나 친족들만 위하는 사람, 또는 자신의 회사 직원들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대해 유난히 야박한 사람을 일컬어 "잘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는 그 표현을 쓸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잘 사는 사람에 대한 내 기준은 이렇다. 첫째 정신의 자주력을 갖춘 사람, 둘째 육신의 자활력을 지닌 사람, 마지막으로 경제의 자립력을 이룬 사람, 이렇게 세 가지 기준에 만족한 사람만이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요인 중에 한 가지라도 부족하면 결코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기준은 내가 스승님으로 받들고 있는 원불교 대산종사의 법문 말씀이다. 나는 이십 대에 이 법문을 스승님으로부터 배웠다. 지금도 조석 심고에 나 자신은 물론 나와 인연을 맺고 있는 혈연 법연 그리고 우리 다 함께 이 세 가지 덕목을 갖추게 해 주십사고 간절하게 심고 올린다.  
  쇠스랑의 삼발처럼, 트라이포트의 세발처럼, 이 세상에 굳건히 디디고 서야할 지지대로써 최소한 이 세 가지 덕목을 갖춰야 지혜와 복덕이 충만한 사람, 즉 "대안정(大安定)을 이룬 사람", 잘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늘 이 표준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산다. 

원불교 대산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