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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도 사은이고 몰라도 사은이다

유마거사 김성철 교수 열반

삼가 고인의 완전해탈 천도를 심축 올립니다. 


우리 곁에 왔던 유마거사 김성철 교수 열반

등록 2023-11-25 10:02수정 2023-11-26 19:26

조현 기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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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열반한 김성철 교수. 사진 조현 기자
 
 
김성철 동국대 WISE(경주)캠퍼스 불교학부 명예교수가 23일 별세했다.
향년 67살.고인은 서울대 치대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및 명상심리상담학과 교수, 동국대 불교문화대학장, 불교문화대학원장, 불교사회문화연구원장, 한국불교학회장,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등을 지냈다.
지난 2월28일 퇴임하고, 3월 일자로 명예교수로 위촉됐다.고인은 평소 심장병이 있었지만,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별세하자 불교계 안팎에서는 ‘다시 보기 어려운 인재’를 잃었다는 안타까운 탄식이 터져나오고 있다.고인은 가산학술상(1996), 불이상(2004), 올해의 논문상(2007), 청송학술상(2012), 반야학술상(2020), 탄허학술상(2021) 등을 불교계 학술상을 휩쓸었을 정도로 연구자로서 큰 평가를 받았고, ‘살아있는 유마거사’란 평을 받을 만큼 남다른 인격으로 주위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고인은 원효보다 150년이 앞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상가로 꼽히는 고구려 승랑 스님에 대한 연구로 ‘한국연구재단 10년 대표연구성과’로 선정되는, 기념비적인 연구 업적을 남겼다.
그는 서울대 사범대 학장과 서울대 불교학생회 지도교수를 지낸 선친 김종서 교수가 가끔 모시고 온 탄허 스님을 어린 시절 집에서 만나곤 했다.
성인의 풍모지만 겸손하기 그지없이 ‘하심’(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으로 일관했던 탄허 스님의 모습은 어린 그에게 깊게 각인됐다고 한다.
선친이 탄허 스님을 모시고 올 때, 여러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만 어른들 틈에 끼여서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마음공부와 불교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고교 2학년 때까지 그림에 심취해 미술반 활동에 열심이었던 예술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려서는 밥 먹고 살기 어렵다. 치과의사는 몇 시간만 일하면 나머지는 원하는 불교책도 원 없이 읽고, 참선도 할 수 있다”는 어른들 말에 치대에 진학했다.
그래서 치대를 다닐 때도, 치과의사로 일 할 때도 틈만 나면 불교책을 보고 참선을 했다.
그렇게 열망했던 공부이기에 그는 삶을 위한 ‘불교학’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제2의 붓다’로 불리는 용수의 중관학으로 석·박사를 했다.
용수는 그에게 직업인으로서 불교학자가 되기에 앞서 삶의 길을 제시해줬다고 밝혔다.고인은 “처음엔 나도 불교 공부를 하면 일부 선승처럼 막행막식을 해도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술도 많이 마셨다. 그런데 용수의 ‘대지도론’을 6개월간 필기를 해가며 읽다 보니, 불법엔 진제만이 아니라 속제, 즉 절대불변의 진리인 진제와 세속적 진리인 속제 둘 다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을 알았다.
진제만 추구하면 사견에 빠져 가치판단을 상실하기 쉽고, 속제만 추구해 계만 지키고 착한 일에만 집착하면 성불할 수 없다.”고 고백하며, “육바라밀 수행을 통해 둘 다 챙겨 이웃도 내 자식을 보살피 듯 보듬고, 공(空)에 대해서도 자각해야 한다는 게 용수 보살의 안내였다”고 말했다.
고인은 분노와 탐욕, 교만과 같은 감성적 번뇌를 치료하는 데도 붓다의 가르침을 최고의 처방으로 제시했다.
그는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반야’(깨달음의 지혜)를 절대부정으로, 화엄경의 화엄을 절대긍정으로 비교하곤했는데, “만약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부정의 반야사상’으로는 ‘너만 그런 게 아니야’라고 조언하고, ‘절대긍정의 화엄사상’으로는 ‘실은 누구나 다 그래’라고 말해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출가자들에 대한 각별한 공경심을 보이며 말을 삼갔지만, 한번의 깨달음으로 만병통치약이 된다면서도 행실이 뒷받침되지 않아 신뢰감을 얻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일침을 놓았다.
그는 인지적 깨달음 즉 머리로만 깨달은 것은 반쪽의 깨달음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인지만의 깨달음은 완성된 것이 아니며, 아직 감성과 정서의 문제가 남아있기에, 인지적 해체만이 아니라 식욕과 성욕, 재물욕, 명예욕, 교만, 분노, 질투, 원한 등의 버릇과 습관에 대한 감성적 해체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인은 “인지적 번뇌인 ‘견혹’(見惑)만이 아니라 감정적 번뇌인 ‘수혹’(修惑)까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불경과 논서에 근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만약 수행자가 감성의 정화 없이 인지의 해체에서 멈출 때 모든 가치판단이 상실된 폐인이 될 수 있고, 선과 악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났다는 자만심에서 악을 행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며, 감성적 정서적 정화가 이뤄지지 않은 가운데 머리로만 이성적으로 깨달았다고 할 경우 구제불능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수행을 하는 것은 부처님처럼 되기 위해서이기에 부처님을 닮으려 할 때 두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보리수 아래서 얻은 지적인 깨달음만 보기 쉽지만, 부처님은 12살 어린 나이에 밭에서 벌레를 새가 먹고 새는 더 힘센 존재에 잡아 먹히는 것을 보고 고통을 느낄 만큼 모든 생명체에 대한 자비심이 있었고, 화려한 왕궁을 버릴 만큼 세속적 쾌락을 싫어하는 염리심이 수행 전에 있었다”며 “그처럼 감성이 정화되지 않은 상태라면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탐심을 없애는 부정관, 분노심을 없애는 자비관, 교만심을 낮추는 하심 등의 수행을 선행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간화선이 최상승의 수행법이긴 하지만, 인지적 수행에 그치는 한계도 있다”고 지적하며, 이분법적인 인지와 애증(애착하고 증오함)의 감성을 모두 해체한 깨달음의 증거로 그는 자비와 지혜를 들었다.
즉 남을 내 몸과 같이 여기는 ‘이타의 감정’인 자비와 ‘절묘한 분별’을 하는 지혜가 없다면 깨달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23호. 발인은 26일 오전 10시, 장지는 서울추모공원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선원, 아들 김용석, 김용범, 며느리 박소연, 유지희 등이 있다.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가신이의 발자취] 도남 김성철 교수를 기리며

고인의 빈소 모습. 조현 종교전문기자 © 제공: 한겨레
 

고인 책 ‘중론…’ 읽고 벅찬 환희심

한국불교 중관사상 논의 본격화시킨

저술 통독하며 중관사상에 매료

“교학과 삶 일치시킨 재가 수행자

지혜 너머 자유로움까지 보셨죠”

 

여기, 더없이 훌륭한 한 사람이 있었다. 지금, 더없이 지혜로운 한 사람이 적멸의 세계로 들어갔다. 도남(圖南) 김성철!

23일 오후 3시25분 김성철 선생에게 전화했다. 선생의 소개로 한 청년이 출가하고자 내가 사는 실상사를 찾아왔기에 오랜만에 안부 인사를 하고 싶었다. 오랜 신호음에도 받지 않았다. 5시54분 전화화면에 한 통의 소식이 올라왔다. 김성철 교수(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명예교수)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 부고 화면이 흐릿하다. 의식이 먹먹하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말이 이런 경우일까? 실감할 수 없는 사실이라니, 난데없는 소식이라니.

 

대략 2004년에 ‘김성철’이란 이름이 나의 삶으로 들어왔다. 선생과 일면식도 없는 나는 먼저 전화를 걸었다. 선생이 쓰신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을 읽고, 벅찬 환희심에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선생에게 나를 소개하고, 좋은 책을 내주셔서 고맙다고 말했다. “늘 연기(緣起)와 공(空)에 대해 나름 천착하고 있는데, 선생님의 이 책을 읽고 의미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그동안 미진했던 것들이 많이 풀렸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 나가르주나 ‘중론’ 공부에 이제는 자신감이 생길 것 같습니다.” 첫 전화에 선생의 음성은 매우 수줍어했다. 이후 공사석에서 선생과 인연이 이어졌다. 이렇게 만남은 ‘법’으로 시작되었고 ‘법’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선생이 입적한 지금 이후로도 선생이 남긴 여러 저작으로 나와 선생의 ‘법의 나눔’은 이어지리라.

선생의 책은 당시 불교계와 학계에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선생의 책으로 한국불교에서 중관사상에 대한 논의와 천착이 본격적으로 발화되었다. 선생의 번역서 ‘중론’도 여러 번 탐독했다. 이 책은 매우 어렵다는 정평이지만, 나는 ‘중론’ 입문서라 할 수 있는 선생의 책 덕분에 중관사상에 매료되었다. 이후, 선생이 쓰신 많은 저작을 탐독하였고, 나의 공부에 탄력이 붙었다. 연기-공-해탈-자비의 연결고리가 확연해졌다. 논리에 의한 이해, 논리로부터 자유로움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래서 지금도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황망한 가슴을 가다듬고 고요히 생각해 본다. 선생의 책에 담긴 행간을 그려본다. 선생이 전공 중관사상과 불교학에서 추구한 뜻은 인간의 자유와 인간에 대한 자비의 구현이라고 생각한다. 선생은 번역서 ‘중론’ 후기에 이렇게 썼다.

‘공(空)이란 수행이라는 수단에 내재함과 동시에 그 목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올바른 공관(空觀)의 토대 위에서 수행 생활을 할 때 우리의 분별심(分別心)은 차츰 정화되어 가고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열리게 된다. 그리고 인식이 변하면 그 존재가 변하게 된다.’

인간은 망념으로 또 다른 망념을 만들고, 삶의 오류와 고통에 속박된다. 그 속박에서 풀려나려면 연기와 공성의 확연한 이해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선생은 간파했다. 종교의 존재 이유는 인간의 고통 해방이며, 그 고통에서 풀려나려면 인식의 오류에서 벗어날 때 가능하다고 정치한 논리로 전개하고 설명했다. 지혜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이렇듯 선생은 평생 지혜를 추구했고, 지혜 너머의 자유로움을 보았던 것이다.

선생은 겸허하면서 당당했으며, 유연하면서도 사유의 골간은 튼튼했다. 교학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수행자였다. 지금, 수줍은 듯 온화한 얼굴이 떠오른다.

선생과 개인적인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선생이 전화를 주셨다. 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 한 사람이 매우 영특하고 품성이 좋은데 출가를 희망한다고 했다. 스승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나에게 보내고 싶다했다. 참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에게 이런 신뢰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붓다는 말씀하셨다. 일체가 무상하다고, 왜 그런가? 인연으로 생겨나고 인연으로 멸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와 삶의 이치가 이러하다. ‘인연생 인연멸’이기에 생명의 실상은 공적(空寂)이다. 이 공적의 세계가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의 아미타불이고 그곳이 정토 세계이다. 선생은 평생 공적한 세계에서 노닐었으니 이미 공적정토(空寂淨土)에 왕생하심은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생은 그러하더라도 남은 벗들의 이 애틋함은 가눌 길이 없다.

도남 김성철 선생이시여! 여기 누가 부르고 있습니까? 지금 누가 듣고 있습니까?

법인 스님/실상사 한주· 전 조계종 교육부장·전 참여연대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