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알아도 사은이고 몰라도 사은이다

의도요목 17. "후생 일은 인과 보복이 어떻게 되는가?"

  모기가 한 방 내 뒷종아리를 크게 물었다. 매우 가렵다. 나도 모르게 모기에게 물렸는데 그래서 기분이 영 좋지 않다. 길을 가다가 오랜만에 친한 친구를 만났다. 모기에 물려 불쾌한 생각은 멀리 사라지고 반가운 마음에 친구와 기쁘게 악수를 나눈다. 그 친구와 근처 카페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는데 다시 종아리 뒤쪽 피부가 가렵기 시작한다. 가려운 것은 몸의 느낌이다. 종아리든 팔이든 얼굴이든 머리든, 몸은 하나로 통하기 때문에 어느 곳에 자극을 해도 두뇌는 이를 모두 느낀다. 귀가하여 자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 종아리를 살펴본다. 여전히 모기에 물린 자리가 벌겋게 부어있다.   어제처럼 모기에 물렸을 때의 생생한 기억은 사그라들었지만 그래도 가려운 이유가 모기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이제 모기를 만나면 탁하고 쳐서 죽이고 싶다.  간단한 상상 속의 에피소드이지만 인과보복은 당일에도 또 한 밤 자고 난 다음 날에도 역시 여실하다.

  50년 전의 일이다. 문학잡지 <월간 문학사상> 1973년 11월호에 이산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가 실렸는데 나는 그때 그 시를 처음 먼넜다. 미당 서정주 시인은 그 호에서 시 "저녁에"의 마지막 두 행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에 대해 극찬의 평을 남겼는데, 팔만대장경을 그 시 마지막 두 행에 압축해 놓았다는 감상을 말했다.

  그 호에는 시인의 노트가 이렇게 달려 있었다. ”전생의 일을 지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데 내생의 일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라며 "현재에 충실할 뿐이다."라는 시인의 말을 남겼다. 그 당시 나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는데 그 시절 나는 시인의 그 말이 뜻하는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즈음 나는 그 말에는 시인이 깨달은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조금 알 것 같다. 

  내생이라든지 현생이라든지 과거생이라는 것은 나의 마음 속에서 분별하는 생각일 뿐이다. 진리는 크게 모두 하나인 노오란 불꽃 속에서 치열하게 적막하는 불생불멸의 진리와 인과 보응의 한 두렷한 기틀을 짓고 있다는 가르침을 믿고 있다. 또 이 진리를 나는 생활에서 실행하고 있다.

  요즈음 나는 때때로 시간이 있을 때 원불교 교전 정전 수행편의 의두요목 17조를 연마한다.

  " 17. 만물의 인과 보복되는 것이 현생 일은 서로 알고 실행이 되려니와 후생 일은 숙명(宿命)이 이미 매하여져서 피차가 서로 알지 못하거니 어떻게 보복이 되는가. (영어 번역문을 함께 보자. 17. The karmic retributions of cause and effect among all things in the present life occur by knowing one another. But how do the retributions of later lives occur, when they have forgotten their past lives and no longer recognize one another?)

  현실 생활에 급급한 우리들은, 깊은 사색을 하지 않고서는,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 외의 다른 세계는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우리는 생명을 가진 존재의 탄생과 성장과 노화와 질병, 그리고 마침내 생명이 사라지는 현상을 무수히 보게 된다.

  그런데 정작 자신도 그러한 생명체들과 같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어 버리고 영생을 살 것처럼 행동한다. 즉, 남녀욕, 재물욕, 명예욕에 사로잡혀 마음속에 갈구하는 집착심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해나가면서 선업(善業)을 짓거나 때로는 악업(惡業)을 지으면서 살아간다. 그 과보로써 우리는 현생에서 필연코 인과 보복이 실행되는 것을 느낀다. 선인 선과(善人善果), 악인 악과(惡人惡果)의 보복을 당하고 만다.

  하지만 열반 후에 ‘후생에서 인과의 보복은 숙명이 이미 어두워 졌는데 어떻게 인과의 이치가 호리도 틀림없이 작용될 것인가?‘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것을 묻는 것이 "의두요목 17조"의 질문이다. 

  나누면 여럿이지만 크게 보면 둘이 아니기에, 현생이든 후생이든, 생명이든 숙명이든, 서로 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숨은 것은 드러나고 작은 것은 커진다는 음양상승의 인과의 이치는 호리도 틀림없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나는 정당한 고락을 취사하길 마음에 새기며, 광대무량한 낙원에서 다 함께 살아가기로 두 손 모은다. 다 함께!

"스승님 소태산 대종사께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소식을 보여 주시다"